“형을 폐하고 아우를 세우면
화란의 근본이 됩니다”
양녕이 폐세자가 된 바로 그날. 태종은 다음 세자를 누구로 정할지 조정과 왕비에게 물었다. 원경왕후는 충녕을 세우는 방식 자체를 걱정했다.
태종은 백관의 상소를 받아들여 세자 이제를 폐하고 광주로 내보냈다. 그 순간 조정 앞에는 더 어려운 질문이 남았다.
양녕이 아니라면, 누구를 세워야 할까?
14년 동안 세자였던 이제는 더 이상 왕세자가 아니었다. 실록은 그를 광주로 내보냈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왕위 계승은 양녕 한 사람을 내보내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태종은 처음에는 폐세자 양녕의 어린 아들 가운데 후계자를 세우려 했다. 장자 계승의 줄기를 완전히 끊지 않으려는 선택이었다.
그런데 대신들이 반대하기 시작했다.
박은은 그런 고제가 없다면 어진 사람을 골라야 한다고 아뢰었고, 유정현도 ‘택현’, 곧 어진 사람을 고르는 것이 마땅하다고 거들었다.
조정의 질문은 ‘누가 장자인가’에서 ‘누가 더 어진가’로 바뀌었다.
이원은 큰일을 정할 때 거북점과 시초점을 치던 옛 사례를 들었다. 태종도 한때 점을 쳐 정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태종은 곧 내전으로 들어갔다.
신하들이 ‘어진 사람을 고르자’고 한다는 말을 태종이 왕비에게 전했다. 왕위 계승의 방향을 두고 부부가 직접 마주한 순간이었다.
원경왕후의 대답은 태종과 달랐다.
원경왕후는 양녕의 동생을 세자로 세우는 데 반대했다. 실록은 태종도 처음에는 그 말을 옳게 여겼다고 전한다.
실록 기록 확인 +
그런데 태종은 잠시 뒤 생각을 바꿨다.
태종은 다시 조정의 논리로 돌아왔다. 이제 문제는 ‘누구를 택할 것인가’였다.
후보를 직접 골라보자.
그날 조정의 선택지는 단순하지 않았다. 양녕의 아들, 둘째 효령대군, 셋째 충녕대군이 서로 다른 논리로 연결돼 있었다.
선택한 뒤 실제 태종의 판단을 확인해보자.
태종은 효령이 성품이 곧지만 일을 조목조목 처리하는 면에서 부족하다고 평가했다. 술을 전혀 마시지 못한다는 점까지 외교 접대의 현실과 연결해 언급했다.
그리고 태종은 셋째 충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태종은 충녕이 추위와 더위에도 밤새 책을 읽어 병이 날까 걱정해 야간 독서를 금지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태종이 본 건 독서 습관만이 아니었다.
실록에서 태종은 충녕이 국가의 큰일에 의견을 내면 합당했고, 때로는 뜻밖의 의견도 많았다고 평가한다.
학문, 판단, 외교까지 평가가 하나로 모이기 시작했다.
‘충녕대군이 대위를 맡을 만하다.’ 태종은 결국 충녕으로 세자를 정하겠다고 밝혔다.
태종의 충녕 평가 보기 +
그러자 신하들도 자신들이 말한 ‘택현’이 누구였는지 밝혔다.
대신들의 ‘어진 사람을 고르라’는 말은 결국 충녕을 향하고 있었다. 후계 구도는 그날 한 번에 정리됐다.
그날 바로 책봉 준비가 시작됐다.
실록은 6월 3일 곧바로 봉숭도감을 설치해 세자 책봉 의주를 마련했다고 기록한다.
14일 뒤, 충녕은 정식으로 왕세자 책보를 받았다.
6월 17일 태종은 정전에 나아가 충녕에게 책보를 내렸다. 책문은 충녕의 총명함과 학문, 효제와 겸공을 세자 책봉의 이유로 들었다.
그리고 두 달도 지나지 않아 더 큰 변화가 찾아왔다.
8월 10일 왕세자는 태종의 내선을 받아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했다. 충녕대군은 이제 세종이었다.
원경왕후가 걱정했던 ‘형을 폐하고 아우를 세우는 선택’은 이렇게 현실이 됐다.
1418년 8월 10일, 충녕대군은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올랐다. 양녕의 뒤를 이을 세자를 두고 이어졌던 논쟁은 결국 이 순간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날 왕이 된 충녕대군이, 우리가 오늘날 세종대왕이라 부르는 바로 그 인물이었다.
1418년 6월 3일,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나
태종은 양녕대군 이제를 폐해 광주로 내보낸 뒤, 처음에는 양녕의 어린 아들 가운데 후계자를 세우는 방안을 생각했다. 그러나 박은·유정현 등을 중심으로 ‘어진 사람을 고르자’는 의견이 나오고, 점으로 정하자는 의견까지 제시됐다. 태종은 원경왕후에게도 물었고, 왕후는 형을 폐하고 아우를 세우는 방식을 화란의 근본이라고 경계했다. 태종은 결국 택현을 택했고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정했다.
시간 순서
자주 묻는 질문
원경왕후는 세종이 왕이 되는 것을 반대했나요?
태종은 처음부터 충녕을 세우려고 했나요?
효령대군은 왜 세자가 되지 않았나요?
충녕은 정말 밤새 책을 읽었나요?
참고한 실록
- 《태종실록》 태종 18년 6월 3일 — 양녕 폐세자·충녕 왕세자 결정
- 《태종실록》 태종 18년 6월 17일 — 충녕에게 세자 책보를 내리다
- 《태종실록》 태종 18년 8월 10일 — 왕세자가 근정전에서 즉위하다
- 우리역사넷 — 세종의 출생·세자 책봉·즉위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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