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도 없었는데
왕비의 네 동생은
왜 모두 죽었을까
민무구·민무질·민무휼·민무회. 네 사람은 군사를 일으켜 궁궐을 공격한 무장반란을 벌인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런데 태종과 조정은 이들을 세자를 중심으로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외척으로 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 가족이었다
원경왕후 민씨에게는 네 명의 친남동생이 있었다. 민무구·민무질·민무휼·민무회. 네 사람 모두 남성이며, 세자 이제에게는 외삼촌들이었다.
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적이었던 외척’의 이야기가 아니다.
1406년, 태종이 왕위를 넘기겠다고 했다
태종은 세자 이제에게 왕위를 넘기겠다는 뜻을 밝혔다. 대신들의 만류 끝에 전위는 철회됐고 태종은 다시 정무로 돌아왔다.
이 사건 뒤, 태종은 민무구·민무질의 태도를 문제 삼기 시작했다.
태종도 이미 두 처남을 위험하게 보고 있었다
1407년 태종은 하륜에게 사람을 보내 민무구 등의 ‘불충한 음모’를 알리고 어떻게 처분할지 의견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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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하들의 요구는 태종보다 더 강했다
대간과 대신들은 민무구·민무질을 왕실을 위협하는 외척으로 규정하며 극형을 반복해서 요구했다.
태종은 당장 죽이지 않고 외방에 안치하는 선에서 처분했다.
“죽이는 것까지는…”
태종은 이들을 유배하고 권력에서 밀어냈지만, 늙고 병든 부모가 있다는 이유로 가까운 곳에 머물게 하거나 생활 기반을 마련해 주기도 했다.
죄는 있다고 봤다. 그러나 가족이라는 이유로 극형은 미뤘다.
왕에게는 위험한 외척, 왕비에게는 가족이었다
원경왕후는 민무질의 아내 한씨를 미복으로 궁에 몰래 들어오게 했다. 일이 드러나자 태종은 관련 내관들을 조사했다.
이 기록만으로 원경왕후가 정치적 음모에 가담했다고 볼 수는 없다.
4년째, 신하들은 물러가지 않았다
1410년 3월에도 종친과 백관은 민무구·민무질을 법대로 처벌하라고 요구했다. 태종은 오랫동안 결단하지 못한 이유를 처가와 가족 관계에서 설명했다.
결국 태종이 직접 자진 명령을 내렸다
1410년 3월 17일, 제주에 있던 민무구와 민무질에게 자진해 죽으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첫 두 형제의 죽음은 태종의 명시적인 자진 명령이었다.
죽으라고 한 사람도, 후히 장사하라고 한 사람도 태종이었다
두 사람이 죽은 뒤 태종은 장례 도구를 보내고 좋은 땅을 골라 후하게 장사하라고 했다. 자신이 그렇게 하는 것은 ‘차마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취지의 말도 남겼다.
정치적 처벌과 가족 감정이 동시에 남아 있던 장면이다.
하지만 두 동생은 아직 살아 있었다
민무구와 민무질이 죽은 뒤에도 민무휼과 민무회는 살아 있었다. 몇 년 동안 이들은 곧바로 같은 처벌을 받지 않았다.
두 번째 사건은 첫 번째 사건의 단순한 연장이 아니었다.
세자와 외삼촌 둘만 남은 순간
원경왕후가 병들었을 때 세자 이제와 효령·충녕대군이 병구완을 했다. 민무휼·민무회가 문안하러 왔고, 잠시 세자와 두 외삼촌만 남게 됐다.
이때 나눈 대화가 2년 뒤 다시 문제 된다.
“두 형은 본래 모반한 일이 없었다”
1415년 국문에서 나온 진술에는 민무회가 세자에게 형들이 본래 모반한 일이 없는데 죄를 받았다는 취지로 말하고, 세자가 자신들의 집안에서 자랐으니 돌봐 달라는 뜻을 전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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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세자 양녕이 외삼촌들의 처벌을 요구했다
1416년 1월 10일, 세자 이제는 민무휼·민무회를 법대로 처치하는 것이 옳겠다는 취지로 태종에게 아뢰었다.
민씨 집안에서 자랐던 세자가 결국 외삼촌 처벌을 요구한 셈이었다.
남은 두 동생도 죽었다
1월 13일 실록은 민무휼과 민무회가 모두 자진했다고 짧게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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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은 자진을 독촉한 관리를 오히려 가뒀다
민무휼에게 자진을 독촉한 원주 목사 권우의 일이 보고되자 태종은 자신이 그런 독촉을 명한 것이 아니라며 화를 내고 권우를 의금부에 가두어 조사하게 했다. 권우는 남성 문신이자 지방관이었다.
네 형제는 모두 죽었지만, 네 사람의 죽음은 같은 사건도 같은 방식도 아니었다.
한 줄로 정리하면
민씨 네 형제는 같은 날 같은 이유로 처형된 사람들이 아니다. 민무구·민무질은 태종이 직접 불충 혐의를 인정하면서도 수년간 극형을 미루다가 1410년 자진 명령을 내렸고, 민무휼·민무회는 1413년 세자와 나눈 대화가 1415년에 다시 문제 되면서 국문과 탄핵을 거친 뒤 1416년 자진했다.
시간 순서
태종은 처음부터 죽이려 했나?
그렇게 단순화하기 어렵다. 태종 본인도 민무구·민무질을 불충하고 위험한 외척으로 보았지만, 한동안 극형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반대로 대간과 대신들은 계속 법대로 처벌하라고 요구했다. 결국 태종은 1410년에 결단했고, 죽은 뒤에는 다시 후한 장례를 명했다.
자주 묻는 질문
민무구·민무질은 실제로 반란을 일으켰나요?
그럼 태종은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신하들만 죽이라고 한 건가요?
민무휼·민무회도 태종이 직접 자결을 명했나요?
원경왕후도 정치적 모의에 가담했나요?
참고한 실록 기사
- 1406년 태종의 전위 시도
- 1407년 민무구 등 처분 논의
- 1407년 원경왕후가 민무질의 아내를 궁에 들인 일
- 1407년 부모 가까이에 두려 한 태종의 뜻
- 1408년 태종이 정리한 민무구·민무질 죄목
- 1410년 민무구·민무질 자진 명령
- 1410년 두 사람의 장례를 후하게 치르라는 명
- 1415년 세자가 1413년의 대화를 밝힌 기사
- 1415년 민무휼·민무회의 국문 진술
- 1416년 세자 이제의 처벌 요구
- 1416년 민무휼·민무회 관련 조정의 죄목
- 1416년 두 사람이 자진한 기사
- 1416년 자진 독촉 문제에 대한 태종의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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