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에 불이 붙었다, 세종은 집을 헐라고 했다|1426년 조선 대화재와 금화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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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6년 한성 대화재 역사 재구성 썸네일
조선실록 · 세종 8년 · 1426
한양에 불이 붙었다, 세종은 집을 헐라고 했다|1426년 대화재
1426년 2월, 거센 서북풍을 타고 한양의 불길이 수천 호의 민가로 번졌다. 이틀 뒤 조정은 단순히 불을 끄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집을 물리고 길을 넓히고 우물을 파고, 결국 화재를 전담할 관청까지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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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6년 한성부 남쪽에서 불이 시작되는 장면 재구성 거센 바람을 타고 한양 민가로 화재가 번지는 장면 재구성 한성 대화재 보고를 받은 조정의 대응 장면 재구성 종루 주변까지 불길이 번지는 1426년 화재 장면 재구성 방화장과 우물, 넓은 도로를 마련하는 한양 방재 공사 재구성 금화도감 설치와 조선의 화재 대응 체계 재구성
1426 · 한성 대화재
01
2월 15일 · 점심 무렵
먼저 기록된 것은 불보다 바람이었다

세종실록은 이날 서북풍이 크게 불었다고 적었다. 그때 한성부 남쪽, 인순부의 종 장룡의 집에서 불이 시작됐다.

불씨 하나가 문제였지만, 도시 전체를 태운 것은 강한 바람과 빽빽한 가옥이었다.

첫날 · 화재 확산
불길은 시장과 민가를 한꺼번에 삼켰다
2,170호+

실록에 적힌 민가만 중부 1,630호, 남부 350호, 동부 190호다. 여기에 경시서와 북쪽 행랑 116간까지 탔다.

사망자는 남자 9명, 여자 23명으로 기록됐지만, 실록은 어린아이·노인·병자 가운데 불타 흔적을 확인하기 어려운 사람은 이 숫자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02
궁궐 · 우선순위
“창고를 못 구하더라도, 종묘와 창덕궁을 지켜라”

왕이 도성을 비운 사이 중궁은 남아 있던 대신과 백관에게 화재 대응을 명했다. 돈과 곡식이 든 창고를 포기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종묘와 창덕궁은 힘을 다해 지키라는 내용이었다.

당신이 그 현장에 있었다면 먼저 어디에 사람을 보냈을까?
재산과 구휼 물자는 중요했다. 하지만 당시 중궁의 명령에서 최우선은 종묘와 창덕궁이었다.
실록에 남은 실제 지시는 이쪽이었다. 종묘가 보전되자 중궁은 그 점만이라도 다행이라고 말했다.
2월 16일 · 급보
도성 밖에 있던 세종에게 급한 보고가 도착했다

서울에 남은 대신들은 녹사 고상충을 보내 화재 상황을 급히 알렸다. 소식을 들은 세종은 크게 놀랐고, 다음 날 궁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날, 한양에서는 다시 불이 났다.

03
둘째 날 · 종루
불꽃이 종루를 넘어 동쪽 민가로 튀었다
200여 호

전옥서 서쪽의 정연 집에서 시작된 불은 전옥서와 행랑 8간을 태우고 종루에 닿았다. 대신과 백관이 힘을 다해 종루는 지켰지만, 불꽃은 동쪽 행랑을 넘어 민가 200여 호를 다시 태웠다.

실록은 이틀 동안 화재를 틈탄 도둑질까지 심했고, 불에 타지 않은 집도 피난 과정에서 재산을 잃었다고 기록했다.

04
2월 20일 · 도시를 바꾸다
세종의 대책은 ‘소화’보다 ‘도시 구조’에 가까웠다

행랑에는 방화장을 쌓고, 성 안의 길은 넓혀 사방으로 통하게 했다. 궁성과 돈·곡식을 보관하는 관청에 너무 가까운 집은 형편에 따라 철거하도록 했다.

행랑 10간마다, 개인 집 5간마다 우물을 하나씩 파고 관청마다 물을 저장하도록 했다. 종묘·대궐·종루에는 불을 끄는 기계도 비치하게 했다.

불이 난 뒤 건물을 고친 게 아니라, 다음 불이 번지지 않도록 도시의 간격과 물길을 다시 설계한 셈이다.

05
2월 26일 · 전담 조직
그리고 조선은 ‘금화도감’을 만들었다

이조는 도성 안에 화재 방지를 전담하는 기관이 없다는 점을 문제로 들었다. 그래서 금화도감을 별도로 두고, 상설 조직으로 화재 예방을 살피도록 청했다.

세종은 이를 따랐다.

06
화재 이후
한 번의 재난이 한양의 방재 체계를 바꿨다

1426년의 대화재는 단순한 사건 기록으로 끝나지 않았다. 방화벽, 도로, 우물, 소화 기구, 대응 인력과 전담 기관이 한 묶음의 정책으로 이어졌다.

실록에서 보이는 변화의 핵심은 하나다. “불을 끄는 법”에서 “불이 번지지 않는 도시”로.

실록에서 확인되는 실제 기록

세종 8년 2월 15일 기사에는 점심 무렵 거센 서북풍 속에서 한성부 남쪽의 장룡 집에서 불이 시작됐다고 적혀 있다. 화재는 경시서와 행랑, 중부·남부·동부의 민가로 번졌다. 다음 날에는 전옥서 주변에서 다시 불이 나 종루까지 위협했고, 종루 동쪽 민가 200여 호가 연소됐다.

첫날 실록에 적힌 피해만 합치면 행랑 116간 + 중부 민가 1,630호 + 남부 350호 + 동부 190호. 사망자는 남자 9명·여자 23명으로 적혔지만, 실록은 확인되지 못한 어린아이·노인·병자는 이 숫자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명시했다.

대화재 뒤 11일 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

2월 15일
한성 대화재 발생경시서·행랑과 중부·남부·동부 민가에 대규모 피해.
2월 16일
두 번째 화재와 종루 위기전옥서에서 종루까지 불길이 닿고, 동쪽 민가 200여 호가 추가 연소.
2월 16일
세종이 급보를 받고 환궁 결정도성에 남은 대신이 화재 상황을 급히 알리자 다음 날 돌아가겠다고 함.
2월 20일
방화장·도로·철거·우물·소화기구 명령도시 공간 자체를 손보는 방재책이 내려짐.
2월 26일
금화도감 설치도성의 화재 예방을 전담해 살피는 상설 조직을 설치.

왜 집을 철거하고 길을 넓혔을까?

목조 건물이 밀집한 도성에서는 건물 사이가 가까울수록 불길이 빠르게 이어질 수 있었다. 세종의 2월 20일 명령은 궁성·전곡을 보관한 관청에 바짝 붙은 가옥을 필요에 따라 철거하고, 성내 도로를 넓게 사방으로 통하게 하도록 했다. 여기에 일정 간격의 우물과 물 저장, 소화 장비까지 함께 규정했다.

후대의 도로 제도에도 이 화재 이후의 방재 논리가 이어졌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1426년 대화재를 계기로 방화장 설치와 가옥 철거, 우물 확보, 성내 도로 개통이 구체화됐다고 설명한다.

금화도감은 어떤 조직이었나

2월 26일 이조는 도성 안에 금화를 전담할 기관이 없다고 지적하면서 별도의 금화도감을 청했다. 실록은 제조 7명, 사 5명, 부사와 판관 각 6명을 두는 구성까지 기록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금화도감을 조선 전기에 방화 업무를 관장하기 위해 설치한 관서로 설명하며, 같은 해 6월 성문도감과 합쳐 수성금화도감으로 개편됐다고 정리한다.

자주 묻는 질문

1426년 화재로 정확히 몇 채가 불탔나?
2월 15일 기사에만 중부 1,630호, 남부 350호, 동부 190호가 적혀 있어 민가 2,170호가 확인된다. 여기에 행랑 116간이 별도로 기록돼 있다. 다음 날에는 종루 동쪽 민가 200여 호가 추가로 불탔다. 서로 다른 날짜의 피해이므로 하나의 숫자로 단순 합산해 ‘정확한 총피해’라고 단정하는 것은 피하는 편이 안전하다.
세종이 직접 화재 현장에 있었나?
첫 화재 당시 세종은 도성 밖에 있었다. 2월 16일 서울에 남은 대신들이 녹사 고상충을 보내 화재 상황을 급히 보고했고, 세종은 다음 날 환궁하겠다고 말했다.
금화도감이 오늘날 소방서와 같은 조직인가?
기능이 완전히 같은 현대 소방서는 아니다. 다만 화재 예방과 대응을 전담한 관서라는 점에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금화도감을 조선 전기의 방화 관서로 설명하고, ‘소방서’ 항목에서는 우리나라 소방관서의 효시로 소개한다.

기록과 참고 자료

본문의 장면 이미지는 당시 사진이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바탕으로 분위기와 상황을 시각적으로 재구성한 이미지입니다. 구체적인 피해 규모·날짜·제도 내용은 위 기록을 기준으로 확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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