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은 이날 서북풍이 크게 불었다고 적었다. 그때 한성부 남쪽, 인순부의 종 장룡의 집에서 불이 시작됐다.
불씨 하나가 문제였지만, 도시 전체를 태운 것은 강한 바람과 빽빽한 가옥이었다.
실록에 적힌 민가만 중부 1,630호, 남부 350호, 동부 190호다. 여기에 경시서와 북쪽 행랑 116간까지 탔다.
사망자는 남자 9명, 여자 23명으로 기록됐지만, 실록은 어린아이·노인·병자 가운데 불타 흔적을 확인하기 어려운 사람은 이 숫자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왕이 도성을 비운 사이 중궁은 남아 있던 대신과 백관에게 화재 대응을 명했다. 돈과 곡식이 든 창고를 포기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종묘와 창덕궁은 힘을 다해 지키라는 내용이었다.
서울에 남은 대신들은 녹사 고상충을 보내 화재 상황을 급히 알렸다. 소식을 들은 세종은 크게 놀랐고, 다음 날 궁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날, 한양에서는 다시 불이 났다.
전옥서 서쪽의 정연 집에서 시작된 불은 전옥서와 행랑 8간을 태우고 종루에 닿았다. 대신과 백관이 힘을 다해 종루는 지켰지만, 불꽃은 동쪽 행랑을 넘어 민가 200여 호를 다시 태웠다.
실록은 이틀 동안 화재를 틈탄 도둑질까지 심했고, 불에 타지 않은 집도 피난 과정에서 재산을 잃었다고 기록했다.
행랑에는 방화장을 쌓고, 성 안의 길은 넓혀 사방으로 통하게 했다. 궁성과 돈·곡식을 보관하는 관청에 너무 가까운 집은 형편에 따라 철거하도록 했다.
행랑 10간마다, 개인 집 5간마다 우물을 하나씩 파고 관청마다 물을 저장하도록 했다. 종묘·대궐·종루에는 불을 끄는 기계도 비치하게 했다.
불이 난 뒤 건물을 고친 게 아니라, 다음 불이 번지지 않도록 도시의 간격과 물길을 다시 설계한 셈이다.
이조는 도성 안에 화재 방지를 전담하는 기관이 없다는 점을 문제로 들었다. 그래서 금화도감을 별도로 두고, 상설 조직으로 화재 예방을 살피도록 청했다.
세종은 이를 따랐다.
1426년의 대화재는 단순한 사건 기록으로 끝나지 않았다. 방화벽, 도로, 우물, 소화 기구, 대응 인력과 전담 기관이 한 묶음의 정책으로 이어졌다.
실록에서 보이는 변화의 핵심은 하나다. “불을 끄는 법”에서 “불이 번지지 않는 도시”로.
실록에서 확인되는 실제 기록
세종 8년 2월 15일 기사에는 점심 무렵 거센 서북풍 속에서 한성부 남쪽의 장룡 집에서 불이 시작됐다고 적혀 있다. 화재는 경시서와 행랑, 중부·남부·동부의 민가로 번졌다. 다음 날에는 전옥서 주변에서 다시 불이 나 종루까지 위협했고, 종루 동쪽 민가 200여 호가 연소됐다.
대화재 뒤 11일 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
왜 집을 철거하고 길을 넓혔을까?
목조 건물이 밀집한 도성에서는 건물 사이가 가까울수록 불길이 빠르게 이어질 수 있었다. 세종의 2월 20일 명령은 궁성·전곡을 보관한 관청에 바짝 붙은 가옥을 필요에 따라 철거하고, 성내 도로를 넓게 사방으로 통하게 하도록 했다. 여기에 일정 간격의 우물과 물 저장, 소화 장비까지 함께 규정했다.
후대의 도로 제도에도 이 화재 이후의 방재 논리가 이어졌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1426년 대화재를 계기로 방화장 설치와 가옥 철거, 우물 확보, 성내 도로 개통이 구체화됐다고 설명한다.
금화도감은 어떤 조직이었나
2월 26일 이조는 도성 안에 금화를 전담할 기관이 없다고 지적하면서 별도의 금화도감을 청했다. 실록은 제조 7명, 사 5명, 부사와 판관 각 6명을 두는 구성까지 기록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금화도감을 조선 전기에 방화 업무를 관장하기 위해 설치한 관서로 설명하며, 같은 해 6월 성문도감과 합쳐 수성금화도감으로 개편됐다고 정리한다.
자주 묻는 질문
1426년 화재로 정확히 몇 채가 불탔나?
세종이 직접 화재 현장에 있었나?
금화도감이 오늘날 소방서와 같은 조직인가?
기록과 참고 자료
- 조선왕조실록 · 세종 8년 2월 15일 — 한성부 대화재
- 조선왕조실록 · 세종 8년 2월 16일 — 화재 보고와 환궁 결정
- 조선왕조실록 · 세종 8년 2월 16일 — 전옥서·종루 주변 화재
- 조선왕조실록 · 세종 8년 2월 20일 — 방화장·도로·우물 등 화재 방비책
- 조선왕조실록 · 세종 8년 2월 26일 — 금화도감 설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금화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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